반성하건데, 나의 눈에는 비판적 시선이 날을 세운채로 있다.
많은 일들의 부조리가 눈에 밟히고 참기가 어렵다.
그 대안들을 제시할 수도 없으면서 잘못되었다고만 목소리를 높인다.
세상을 이롭게 바꿀 수도 없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저 불만어린 투정일 뿐일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는 꽉 막히고 공격적인 인간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반대로, 안주하며 긍정을 항상 간직하는 것이 정답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유시민 선생님의 말씀중 [알쓸신잡 시즌2]에서 하셨던
이야기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일체유심조, 사회비판 그 중간에 길이있다.”라는 이런 맥락의 이야기였다.
마음에 들었다.
사회비판과 종교적인 평화, 양립할 수 없는 그 이념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한 쪽에 치우쳐 맹목적으로 되는 순간,
“나”를 보지 못한다.
“나”를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나로부터 출발하고
내 세계의 전부이고
온 세상, 온 우주 그 중심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이유를 갖고 있다.
많은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유가 존재하지만
사실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물어본다. 밥을 왜 먹냐고,
그 이유는 배고프니까, 혹은 생존을 위해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그럼 왜 살기위해 밥을 먹느냐고 물어본다.
삶의 이유를 묻는 것이다.
왜요? 라는 질문의 끝에서는 결론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하나의 이유 혹은 명분을 만들 뿐이다.
삶이라는 건, “나”가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은 어떤 대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만유인류의 법칙.
사물과 사물 사이에 서로 작용하는 힘이 존재하듯이
내가 삶에 존재하려면 생의 이유가 필요하고, 그곳에 매여야만 지탱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유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나 보다.
그것은 생의 작용 반작용이다.
이것이 나의 ‘이유를 찾는’이유의 답이다.
따라서 “나”를 바라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이유는 “나”로부터 시작되니까
많은 것들의 이유를 찾고, 혹은 만드는 것
그 자체가 삶이라고 생각한다.
맹목적이여서 “나”를 보지 못한다면
생리학적으로는 살아있다 할 수 있으나,
살고있다 볼 수 없다.
오늘도 그 사이에 서서
행복을 위해, 혹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이유를 찾을 것이다.